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스탄티노스 10세 (문단 편집) === 북방 정책 === [[1059년]]에 이사키오스 1세의 원정으로 발칸 북쪽에 자리잡았던 [[페체네그]] 등 [[유목민]]들은 [[다뉴브 강|이스트로스 강]]을 건너 도주했다. 그러나 [[1065년]]이 되자 이들은 재차 [[오우즈족]]의 이름을 걸고 대규모 민족을 이루어 남하했다. 불가리아와 모이시아의 향군(鄕軍 : Themata)들이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쉽게 격파당하고 말았다. 오우즈족 이하 유목민들이 북쪽에서부터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각지로 흩어져 약탈을 일삼자 위기가 고조되었다. 콘스탄티노스는 대군을 소집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지만 가뜩이나 군부와 갈등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대군을 소집해도 지출할 막대할 경비는 물론 이들을 통제할 자신도 없어했다. 그리하여 일단 시간을 번다는 명목 아래 외교 사절단을 오우즈족에게 파견하여 선물 공세로 침략을 늦추고자 했다. 그러나 민심은 재차 악화되어 어서 출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황제는 동방에서 군대가 수도에 도착하기 이전에 15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미리 출발했다. (통상 지역의 병력을 소집하고 수도에서 출발하는 황제는 150명의 병력을 데리고 출발하며 이후 각 지역에 설정된 집결 지점에서 각 군세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병력을 집결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우즈족은 바로 그 직후 불가리아 지역 향군과 제국에 충성하는 토착 유목민 부대의 반격으로 붕괴되었으며 나머지 세력들도 풍토병으로 고생하다 끝내 다시 강을 건너 도주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이에 만족하며 포로들에게 시민권을 주고 지도자들에게는 원로원 의원의 자격을 주어 사회 내부로 받아들였다. [[1066년]]에는 [[페체네그족]]이 다시 침입을 위해 남하하였으나 모이시아 절도사인 [[로마노스 4세|로마노스 디오예니스]]에 의하여 완전한 패배를 당하고는 북쪽으로 물러났다. 페체네그족이 다시 공격을 시도하게 되는 것은 8년 뒤 네스토르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었다. 북방에 있어서 콘스탄티노스는 [[바실리오스 2세]] 이래의 정책을 그대로 고수하였다. 발칸 산맥 이북은 적의 거점으로 활용되지 않도록 일부러 저발전 지역으로 남겨두고 주요 거점만 유지했으며 유목민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여 이 지역의 방어를 확립했다. 천연의 청야 작전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있는 공간을 두어 완충지로 삼는 이 정책은 상당히 유효하여 [[콤니노스 왕조]] 시대에도 이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